08:15 ― 연구실 출근 직후
커피 포트가 끓는 동안 메신저 알림 하나가 눈에 띄었습니다. “딱 오늘만, 지포스 RTX-4090 신품 40% 할인.” 학회용 실시간 렌더링 데모를 준비하느라 GPU 메모리가 늘 모자란 터라, 단번에 관심이 쏠렸습니다. 링크를 따라 들어가 보니 ‘VR월드 바로배송’이라는 소규모 몰이었고, 재고 수량은 3개로 표시되었습니다. 결제 마감 시간이 오전 11시라서 ‘일단 담아 두고 생각하자’는 마음으로 장바구니에 넣어 두었습니다.
10:02 ― 첫 번째 흔들림
메일함에 “고객님 장바구니 쿠폰 지급” 제목의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클릭해 보니 3만 원 추가 할인 코드가 적혀 있더군요. 연구실 동료에게 “이 정도면 사도 될까?” 하고 묻자, 그는 “요즘 반도체 공정 이슈 때문에 정가도 안 떨어진다”고 귀띔했습니다. ‘득템’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맴돌며 클릭 속도를 부추겼습니다.
10:47 ― 이상 징후 발견
카드 결제를 누르니 팝업창이 뜨며 “현재 카드사 모듈 점검 중입니다. 계좌이체 시 5% 추가 할인!”이라는 문구가 나타났습니다. 결제 인터페이스가 평소 보던 PG사 화면과 달라 잠시 멈칫했지만, “전산 작업 때문에 잠시 우회 결제”라는 안내가 덧붙어 있었습니다. 제 손목시계는 11시가 가까워졌고, 타이머는 빨간색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11:03 ― 거래 중단 버튼 누르기 직전
이체할 은행 앱을 띄우고 계좌번호를 붙여넣으려던 순간, 수취인 이름이 회사명이 아닌 개인 이름이라 눈길이 갔습니다. “혹시 법인 통장 준비 중이라 임시 계좌를 쓰는 건가?” 싶었지만, 이미 똑같은 경험을 한 적이 있어 한발 물러섰습니다. 저는 지원 페이지 하단에 적힌 고객센터로 전화를 걸었으나 “현재 통화량이 많다”는 음성 안내만 반복되었습니다.
11:18 ― 로그를 멈추고 리서치 모드 돌입
불안이 커져 크롬 시크릿 창을 열고 몇 가지 키워드를 조합해 검색을 시작했습니다. 도메인 등록일은 불과 2주 전, 서버 위치는 파나마였고, 상호명으로 등록된 사업자 정보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리뷰 탭에는 “정품 빠른 배송” 같은 짤막한 후기만 열 줄쯤 있었는데, 모두 작성 날짜가 전날 밤이었습니다. 저는 이미지 검색으로 후기 사진 중 하나를 추적해 봤습니다. 결과는 해외 하드웨어 리뷰 사이트에서 2024년 초 게재된 공식 제공 사진. 소비자 실물 샷이 아니었던 겁니다.
11:26 ― 먹튀위크 검색
마지막 확인 차원에서 먹튀위크 먹튀검증 에 상호명과 계좌번호를 넣어 봤습니다. 불과 이틀 전 “이체 후 발송 지연”을 넘어 “연락 두절”로 결론 난 사례가 올라와 있었습니다. 계좌 마지막 네 자리와 고객센터 번호까지 동일했습니다. 이 정보 하나로 마음이 반쯤 정리되었습니다.
11:30 ― 포기 선언
결제 페이지를 닫고 장바구니를 비웠습니다. 동시에 연구실 단톡방에 해당 사이트 링크와 의심 정황을 공유했습니다. “사실 나도 방금 보다가 이상했어”라는 반응이 줄줄이 이어졌습니다. 우리는 실험 로그를 다시 돌리며 입을 모아 ‘싼 게 비지떡’이라는 상투적 문장을 재확인했습니다.
14:20 ― 후속 조치
점심을 마친 후 가격 비교 포털에 의심 제보를 넣었고, 두 시간쯤 지나 ‘파트너 등록 취소’ 안내 메일을 받았습니다. VR월드 바로배송은 그새 도메인을 폐쇄했는지 접속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혹시 모를 스팸 결제를 막기 위해 쓰지 않는 카드의 해외결제 기능을 잠정 중단했고, PC에 깔린 원격 제어 프로그램 로그도 점검했습니다.
사후 회고 ― 남은 세 줄 메모
- 가격이 3할 이상 낮으면 합리적 의심이 최우선입니다.
- 카드 막힘+계좌이체 유도+법인 미표시는 붉은 신호입니다.
- 먹튀위크 등 외부 커뮤니티를 통한 이중 검증이 시간을 아껴 줍니다.
이번 사건으로 인한 금전적 손실은 없었지만, ‘거의 샀다’는 자책감이 반나절 스트레스로 이어졌습니다. 연구 성과를 내기 위해선 장비 투자가 필요하지만, 장비보다 더 중요한 건 연구 데이터를 지킬 제 지갑이더군요. 앞으로는 특가 버튼보다 WHOIS와 사업자 조회 버튼을 먼저 누르기로 했습니다. 기회는 다시 오지만, 잃어버린 예산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몸으로 배웠습니다.